우리는 누구나 잘 되기를 원합니다.
직장 또는 사업의 일, 학업이나 진로의 일,, 세상이나 관계나 모든 일들에 있어 우리 모두 다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잘 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우리는 어떤 상태를 잘 된다고 말하는지 먼저 보겠습니다.
잘된다는 것, 이 개념 자체를 우리는 내 능력안에서의 잘됨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잘된다는 개념에는 내 능력 이상의 어떠한 성과, 내 생각 이상의 결과, 내 한계를 넘어선 수치에
대해 이 일이 잘 되었다라고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능력과 생각, 한계를 넘어선 잘됨은 어떻게 올 수 있는가?
그것은 나와 함께 한 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혼자 넘지 못하는 일을 둘이 하면 감당이 되고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세상의 일이 나 혼자 잘되서 잘되는 일이 있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날 때에 내가 가지고 있는 부족을 채우고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좋은 남편, 좋은 아내를 만나야 하는것이고,
사업이 잘되려면 좋은 동료, 좋은 직원, 좋은 거래처를 만나야 하는 것이고,
직장생활이 잘되려면 좋은 선후배, 좋은 동료를 만나야 합니다.
학업이 잘되려면,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좋은 사람인가? 의 분별이 문제가 됩니다.
노랑머리의 아들친구, 엄마가 보기에는 제발 아들이 그와 안다녔으면 좋겠다고 항상 이야기합니다만, 아들의 이야기는 다르죠. 그 친구 좋은 친구야 엄마.
어른은 다를까요? 아내가 제발 그 사람하고는 그만 좀 다녀라 합니다만, 남편의 이야기는 다르죠. 그사람 좋은 사람이야.. 어떤 중요한 결정에 여보 그건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지만, 남편은 중대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을 가리는 가요.
어린 때는 나랑 놀아줘서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친구입니다.
어른이 되서는? 같습니다. 나랑 놀아주고 (술, 낚시 종목이 다를뿐),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술좋아하는 사람은 같이 술먹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게 기준이라고 말할 수 없는 기준이라고 다들 생각하면서도 그 기준을 두고 좋은 친구를 분별합니다.
그래서 명확한 기준이 중요합니다.
기준은 흔들리지않는 변하지 않는 점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변하지않는 기준은 정직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거짓은 모든 죄를 양산하고, 거짓은 남을 속일 뿐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입니다.
자기가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기의 거짓을 가려야 하기때문에 다시 거짓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에 스스로 넘어집니다.
거짓이 나를 포장하기 시작하면 내 영혼은 병듭니다. 내영혼이 병들면 내 정신도 온전해 지지 않습니다. 육신도 병들게 되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도미노 현상입니다.
다시말하면 거짓된 사람은 무너지게 됩니다. 무슨 일에도 잘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짓된 사람이 뭔가 지름길을 가고 빠르게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줄 때가 꽤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보이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거짓된 사람은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잠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좀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부분은 정직과 착한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착하면 정직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착하나 정직하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정직하지 않고 착하다는 공식자체가 맞지 않습니다.
착하다는 개념의 정의와 범위가 어떻게 되는가의 차이가 있겠지만.
쉽게 말해서 착하면 정직하고 정직하면 착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등식이 성립이 안된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이 정직도 하겠지에 속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정직한 것은 정직한 것으로 따로 봐야 합니다.
저사람 분명 착한 사람인데 거짓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정하고 사기치는 사람아니고는 아이러니하게도 저사람 착한 사람인데 했던 사람에게 잘못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이런 일이 됩니다.
결론입니다.
인생이 잘 풀어지고 형통하기를 원한다면,
정직하십시요.
왜냐면 당신이 정직하면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정직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 옆에는 당연히 술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사람이 건강상의 문제로 술을 끊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겠습니다. 축구를 하기 시작했으면 주변에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필라테스를 시작했다면 필라테스를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깁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쓰는 전문적인 단어가 쓰여지고, 그들만의 통하는 대화로 바뀝니다.
내가 거짓되면 내 주변은 거짓된 자들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웬만한 거짓은 허용이 됩니다. 합리화가 됩니다. 그것은 거짓을 양산합니다. 거짓과 거짓이 만나면 겉잡을 수 없는 거짓의 산이 순식간에 쌓여집니다.
거짓은 거짓으로 덮어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는 그 무리안에서 원치않게도 거짓을 동조할 수 밖에 없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노골적인 설득과 강요를 받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싫었는데 어느 때에는 내가 또 거짓을 강요하는 자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결국 내가 거짓되면 뭐가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된 사람과의 이런 만남과 거짓의 행위가 이어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정직하면 내 주변은 정직한 사람으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거짓은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내가 정직하면 거짓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을 분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됩니다.
거짓된 자와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하고 싫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내 인생이 잘 풀어지려고 한다면 나를 옳게 바꾸어 내야 합니다.
속이는 저울을 정직한 저울로 바꾸고, 거짓의 말과 변명을 정직한 말과 회개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주변은 내가 만듭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불러들인 사람들이란 사실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실패와 나의 문제는 내가 불러들인 사건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하고 주의하여야 합니다.
한가지 좀 더 중요한 결론으로 마무리하자면,
사람이 사람을 속이려고 하면 속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식과 지혜를 내안에 쌓는 일입니다.
속이는 사람은 우리가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모든 오감을 속이고 들어옵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에게 느껴지는 웬지모를 기분, 느낌, 뭔가 같이 하면 안될 것 같은 분별을 우리는 육감이라고 합니다.
맞는지 틀리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그래도 이 육감이 뛰어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으려면 육감도 소용없습니다.
일곱번째의 감각은 영감입니다.
세상 모든 지식, 상식, 오감에 육감, 모든 것을 동원해도 구별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영감입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지어졌습니다. 또한 영감은 우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부여합니다.
딤후 3:16 (새번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내 인생이 잘 풀어지기를 원한다면 정직한 자와 함께 하는 것이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거짓된 자와 함께 손 잡았다면 우리의 넘어짐은 예정된 길입니다.
기본위에 제대로 된 기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경험, 가치, 유행, 사람의 성향,, 모든 것이 변합니다.
모든 일에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질 때에 온전한 분별력이 생깁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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